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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김자수 선생 묘역 및 역사
"여자도 不敬二夫(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어찌 두 왕을 섬길 수 있으랴"
 
상촌신문 기사입력  2018/11/09 [18:43]

상촌 김자수 선생은 고려 충정왕 3(1351)에 태어나 올해 탄덕 667년이 된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경기도 기념물 제98)에 안장된 상촌선생의 묘역 및 역사를 알아본다.<편집자 주>  

▲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98호,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석양과 망주석이 각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상석·장명등·석양 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김자수 선생 묘역 및 역사

 

상촌(桑村)선생은 대사헌을 지낸 영유의 조부이시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신도비(구 신도비는 뉘어져 보관되어 있음)가 있고 아래쪽에 사당이 있다.

 

고려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 선생은1374(고려 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 받은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 4(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며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김자수 선생은

 

상촌(桑村)선생은 고려 충정왕 3(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李穡(이색)이었고, 선생으로 朴尙衷(박상충), 鄭夢周(정몽주), 金九容(김구용), 朴宜中(박의중), 李崇仁(이숭인)이 있었다.

 

선생은 포은 다음으로 이어진 생려효자였다. 형이 벼슬살이로 나섰기에 자신은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살려 하였으나, 과거에 나서라고 하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성균관에 들어가서, 머문 지 채 1년이 안 되어, 어머니에게 병환이 있음을 알고 급히 내려가서는, 2년을 하루같이 어머님을 보살피며 약을 구하려고 헤매었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리며 효를 다 하였지만, 끝내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어머님 묘소 곁에 움집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旌閭(정려)를 명하시고, 畵工(화공)에게 명하시어 出居廬圖(출거여도, 묘에서 여묘하는 모양을 화폭에 담은 그림)를 그리게 하고는 이를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훗날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을 侍墓洞(시묘동)’이라 부르고, 그가 살던 안동 남문 밖에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하였다.

 

공민왕 22년에 효자로 정려가 내려지니 이른바 생려효자였다. 그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와비

 

원래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워놓았다 한다.

 

▲ 와비: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神道碑(신도비)     © 상촌신문


고려 말,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충청도 관찰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 집으로 돌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셨다.

 

새 정부가 두문동을 불살라 버리자 선생은 향리 안동으로 다시 돌아 오셨다. 조선이 건국된 후 이성계는 그와의 친분을 고려하여 그를 대사헌으로 불렀으나, 그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방안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이 다시 병조판서로 부르면서 나오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다.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지박살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한 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라가 망하면 같이 죽는 것이 도리이다. 내 평생에 충효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어 왔는데 이제 몸을 잃으면 무슨 낯으로 조상들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내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

 

이윽고 그는 조상의 사당에 엎드려 절한 후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내 장례식에 쓸 물품들을 챙기거라

 

깜짝 놀란 아들이 되물었다. “갑자기 웬 장례물품입니까?”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이 있다.” 이윽고 감자수는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 순절비각     © 상촌신문


 순절비각

 

그의 아들 ()은 장례 때 쓸 물건을 챙겨 뒤따랐다. 성균관시절 스승으로 모셨던 정몽주 선생의 묘지를 참배 한 후 秋嶺(추령, 현재 대지산 준령인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고갯마루에 서서 산천을 둘러본 후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 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 뒤로는 스승인 포은 鄭夢周(정몽주) 묘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 것이다.

 

▲ 와비, 신도비, 순절비각 전체전경. 신도비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사진과같이 뉘어져 보관중이며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웠다.     © 상촌신문

 

여자도 不敬二夫(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어찌 두 왕을 섬길 수 있으랴하고 아들 근에게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하고 유언을 하기를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며, 행적을 金石(금석)에 새기지 말라.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널리 알리게 되면 武人(무인) 투성인 신조정에서 자손들에까지 해를 미치게 할 것이 염려하는 말을 남기고 그는絶命詞(절명사)’ 시 한 수를 남기고는 독약을 삼켜 자결하셨다. 때는 태종 13(1413) 1114일 이었으며 향년 63세였다. /상촌신문(http://sangch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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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09 [18:43]  최종편집: ⓒ 데일리코리아( http://www.dailykorea.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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