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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상촌공파 파조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김기숙 기자 기사입력  2018/12/13 [17:18]
▲  상촌 김자수 묘소 및 와비, 비각    

 

애국충군(愛國忠君)’, ‘불사이군(不事二君)’ 의 충절을 후손에게 널리 알려 자손만대 귀감을 삼고자 역사의 발자취를 알아본다.-----편집자 주

 

조선시대에 서로 대립했던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는 뿌리가 같다.

 

이들 모두가 고려 말기에 나타난 신흥사대부 세력의 후예들이다.

 

원이 고려를 속국으로 삼자, 이에 아부하여 권세를 누리는 세력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고려 말의 권문세족들이다.

 

이 때 등장한 개혁 정치세력이 바로 신흥사대부였다. 이들은 권문세족의 등살에 허리가 휘는 일반 농민들에게는 떠오르는 새로운 정치세력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려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개창하자는 역성혁명파와, 고려 자체는 존속시킨 채 개혁만을 수행하자는 고려개혁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들이 각각 훈구파와 사림파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혁명파는 이성계와 손을 잡고 강력한 무력적 기반을 형성한 정도전·하륜·조준 등이 핵심 인물이었고, 개혁파는 오로지 문신관료들로서 정몽주·길재·이색을 비롯해 두문동 72현 중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자진한 김자수 등이 있었다.

 

혁명파가 개혁파의 처지는 이후 크게 달라지게 된다. 개혁파의 대표주자인 정몽주는 혁명파인 이방원에게 타살되었다, 유교의 충절을 중시하던 정몽주에겐 감히 이성계의 역적 음모는 생각지도 못할 꿈이었고, 이것이 바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이유였다.

 

김자수 역시 고려왕조가 몰락하자 절명사를 짓고 자결하고 만다. 김자수 이외에도 이성계가 주는 그 어떠한 관직도 받지 않았던 두문동 72으로 임선미, 조의생, 성사제, 박문수, 김충한, 이의 등이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들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두문동에 칩거했다. 동서쪽에 문을 세워 걸어 잠그고 일체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

 

조선 정조 때 왕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1783년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로 남게 되었다.

 

비록 고려왕조는 비참하게 막을 내렸지만 절의를 꺽지 않은 김자수와 같은 충신들의 충성심이 신하의 충절을 기반으로 한 사림정신으로 승화되어 결국은 새로운 조선왕조의 유교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상촌신문(http://sangch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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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13 [17:18]  최종편집: ⓒ 데일리코리아( http://www.dailykorea.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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