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옥(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Ⅰ. 머리말
6·25전쟁 때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 이후 전쟁의 주요 고비마다 기적과 같은 일들이 벌어져 대한민국은 살아남게 됐다.
북한군의 기습남침과 이후 북한군의 막강한 전력을 미군이 참전할 때까지 국군이 버텨낸 것이 그렇고, 북한군이 서울 진입시 김일성이 최초 계획을 바꾸어 한강 교량 대신 중앙청과 방송국 등 주요시설을 우선 점령하라고 명령한 것이 그렇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그곳에서 3일간이나 지체한 것이 그렇다. 남한에서 20만 명의 ‘인민봉기’와 부산에서 노동자들의 집단 파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그렇고, 북한이 최초 그들의 남침공격계획대로 전쟁이 진행되지 않는 것이 그렇다.
또한 미국의 신속한 한국전 참전결정이 그렇고, 유엔안보리의 신속한 소집과 한국에 대한 집단안전보장조치에 의한 유엔회원국의 무력지원 결정이 그렇고, 소련이 유엔안보리에 불참함으로써 한국지원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것이 그렇고,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의 6월 29일 때맞춘 한강방어선 시찰과 그에 따른 미 지상군 참전을 워싱턴에 요청한 것이 그렇고,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에 지상군 파병결정이 그렇고, 낙동강의 불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맥아더 장군의 극적인 인천상륙작전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은 전쟁초기 감투정신과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친 국군의 활약상이다. 전쟁 초기 전차공포증에 걸린 국군이 중국의 국공내전시(國共內戰時) 장제스(蔣介石)의 군대처럼 부대단위로 집단투항하지 않은 것이 그렇다. 만약 국군이 미국을 비롯한 유엔참전국이 들어오기 전에 북한군의 남침공격계획대로 이뤄졌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6·25전쟁 3년 1개월 4일, 즉 1129일간의 전쟁동안 국군은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부대단위 또는 집단으로 공산군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각개 장병들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도 이들은 기회만 되면 탈출을 시도하여 그중 많은 수의 포로들이 탈출에 성공했다.
국군이 전쟁 기간 중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전 군에서 공산세력을 척결한 숙군(肅軍)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군은 숙군을 통해 반공군대로 거듭났고, 반공정신으로 무장한 국군의 위력은 전쟁을 통해 그 빛을 보게 됐다. 나아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
Ⅱ. 북한의 ‘남침승리’ 가능성과 실패요인
북한은 6·25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남침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남침직후부터 북한의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은 1개월 만에 끝낼 계획을 수립했으나 전쟁은 3년 1개월이라는 장기전으로 마무리됐다.
6·25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불과 2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일성에 의해 자행(恣行)된 6·25전쟁은 온 민족을 살육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3년간의 전쟁으로 전 국토는 파괴됐고, 국군은 14만 명이 전사하고, 45만 명이 부상을 입고, 3만 명이 실종 또는 포로가 됐다. 북한군도 52만 명의 전사와 12만 명의 실종 및 포로가 발생했다. 민간인 피해를 제외한 남북한 군인피해만 해도 120만을 상회하는 어마어마한 인적손실을 입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 국토가 공동묘지로 변했다며 한탄했다.
김일성은 이러한 민족상잔(民族相殘)의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노름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했다. 이를 위해 그는 동분서주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몰래 오가며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눌 전쟁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소련으로부터는 전차 242대, 야크(Yak)-9 전투기 등 각종 항공기 226대, 자주포 등 각종 대포 728문, 기동성이 뛰어난 2인승 모터싸이클 540대를 도입했다. 반면 국군은 전차와 전투기 그리고 모터싸이클은 단 한 대도 없었고, 대포도 북한군 대포사거리의 절반 밖에 안 되는 구형 105밀리 대포 91문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포의 성능을 고사하고라도 숫자 면에서 9대 1의 열세였다. 무기체계면에서 충분히 승리할 조건을 갖췄다.
김일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전사(戰士)’들을 중국으로부터 들여왔다. 김일성은 중국으로부터는 약 6만 명에 달하는 한인(韓人)병사를 지원받아 북한군에 편입했다. 중공군 제164사단이 북한군 제5사단으로, 중공군 제166사단이 북한군 제6사단으로, 중공군 독립 제15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으로 하루아침에 둔갑했다. 북한군 최정예사단으로 알려진 북한군 제4사단 제18연대도 중공군 내 한인병사로 구성된 중공군 연대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병력(국군 10만, 북한군 20만)이나 전투수준에서 국군을 훨씬 앞질렀다. 중공군에서 편입된 병력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단련된 고참병들이었다. 그만큼 북한군의 전투력 수준은 매우 높았다. 이에 맥아더 장군이 1950년 7월 초, “북한군은 현대식 무기로 장비하고 훈련도 잘 된 군대”라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군은 전투력 면에서 국군을 압도했다.
국군을 압도할 무기와 장비 그리고 전력을 갖추게 되자 김일성은 이를 운용할 남침계획을 수립했다. 남침계획 수립시에는 소련의 힘을 빌렸다. 김일성은 제2차세계대전시 전투경험이 풍부한 바실리예프 중장 등 소련군사고문단이 작성해 준 남침공격계획을 갖고 전쟁을 수행했다. 남침계획에 나타난 작전개념은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김일성이 소련에게 남침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소련수상 스탈린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이에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전쟁계획을 세웠다.
소련의 전략가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미국 본토의 병력이 한국에 도착하는데 빨라야 45일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고려해 미 본토병력이 참전하기 전인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그래도 만일 미군이 참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군이 들어올 남해안의 항구(목포항, 여수항, 부산항)을 사전에 점령하여 미군의 남한상륙 저지를 남침계획에 반영했다. 그 과정에서 서울을 2일 만에 점령함과 동시에 전차로 한강교를 차단하여 서울이북의 국군주력을 격멸하고, 이때 강원 홍천을 1일 만에 점령한 후 그곳으로 540대의 모터싸이클 부대를 투입하여 수원 이남을 차단함으로써 한강이북의 국군을 완전히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남침에서 이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남침했다.
여기에 김일성은 전쟁결정과정에서 박헌영이 장담했던 서울을 점령하기만하면 남한 내 남로당원 20만 명의 ‘봉기’를 기대했다. 대한민국 곳곳에 침투해 있던 공산세력의 ‘봉기’는 대한민국을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는 비장의 무기로 여겼다. 특히 군대에서의 반란은 북한군의 전쟁승리에 더 없이 중요한 요소였다. 그렇게만 되면 대한민국은 밖의 북한군의 공격과 내부의 반란 내지는 폭동으로 외우내환의 위기를 맞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꼼짝없이 북한군에 당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해방 5주년 8·15기념식을 남한을 완전히 공산화한 후 서울에서 개최할 계획까지 세웠다. 김일성은 그만큼 전쟁에 대한 승리를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으나, 전쟁은 그들의 계획대로 수행되지 않았다. 서울을 4일째에야 간신히 점령하는 바람에 전차에 의한 한강교를 차단하지 못했다. 또 홍천에서 투입하기로 했던 모터싸이클 부대도 6월 30일에야 홍천에 진출함으로써 수원이남에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계획은 아예 시도조차 못했다. 이후 모터싸이클은 지휘용 또는 연락용으로 쓰이게 됐다.
이처럼 북한군의 초기 작전실패로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스탈린과 김일성이 전쟁모의단계에서 가장 우려했던 미국이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것은 6월 29일 한국전선을 책임진 맥아더 원수가 한강방어선을 시찰했고, 그때 맥아더는 한국군병사로부터 “상관이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 진지를 사수하겠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이니 이를 지원해 달라”고 함으로써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켜, 결국 미지상군이 한국전선에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미군은 3일만 한강방어선을 지켜주면 된다고 했는데 국군은 6일간 한강방어선을 지켜냈다. 그것도 박격포 몇 문과 소총만으로 지켜내는 기적을 이뤄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북한군은 병력이나 전투력 수준 그리고 월등한 무기체계를 갖추고도 그들의 남침계획대로 국군을 조기에 격멸하지 못하고, 미군의 참전을 불러들이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까? 그 원인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군이 병력의 열세와 빈약한 무기로 소련제 현대식 전차·자주포·전투기를 앞세운 북한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이다. 전황이 불리하여 불가피하게 포로가 될지언정 중국의 장개석 군대나 히틀러의 군대처럼 몇 만 또는 수십만 명이 건제를 유지한 부대단위로 집단 투항하는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국군은 북한군이 전진하면 그만큼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한 다음, 다시 북한군에 맞서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북한군 전차를 파괴할 마땅한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화염병·수류탄·박격포탄 등을 가슴에 껴안고 적 전차로 돌진하여 장렬히 산화했다. 전투기가 없던 공군도 연락기나 연습기를 타고 15kg 사제폭탄이나 수류탄을 싣고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 공중 투하로 적을 공격했다. 눈물겨운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지연시켰고, 적 전차의 한강교 점령을 차단시켰으며, 춘천과 홍천을 통해 고속기동부대를 투입하려는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결국 김홍일 장군에 의한 6일 간의 한강방어선을 가능케 했고, 이에 따라 맥아더 장군의 한강선 시찰과 이에 따른 미군참전을 가능케 했다. 국군은 감투정신과 결사항전(決死抗戰) 정신으로 한강방어선까지 이를 악물고 버티어냈다.
국군의 그러한 감투정신과 결사항전 정신은 모두 반공정신에 기인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반공국가였고, 국군도 아시아의 몇 안 되는 반공군대였다. 그것은 전쟁이전 군대 내에 침투해 있던 공산세력을 발본색원하여 군대를 반공정신으로 깨끗이 정화(淨化) 내지는 정리(整理)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한민국 국방사에서는 이를 숙군(肅軍)으로 평가하고 있다. 숙군은 제주 4·3사건과 여순10·19사건을 치르는 과정에서 국군에 침투하여 암약하고 있던 남로당 등 공산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단행됐다. 만약 그때 숙군을 하지 않고, 전쟁을 치렀다면 무기와 병력이 열세한 국군은 전력이 월등한 북한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Ⅲ. 숙군의 배경과 주역 및 조력자들
1. 이승만 대통령과 군 수뇌부의 숙군의지
숙군의 직접적인 계기는 여수주둔 제14연대에 침투한 공산세력의 반란사건, 이른바 ‘여순사건’이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군 수뇌부는 반란을 일으킨 공산분자들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천명했다. 여순사건 발생 3일 후인 10월 22일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은 “정부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거나 혹은 선동하는 분자에게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며 대대적인 숙청을 예고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10월 24일 담화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지하에서 공작해 전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고, 정부에서는 이런 분자들을 단호하게 숙청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1월 4일, “각 급 학교와 정부기관을 조사해 공산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법령을 발표 하겠으니 국민들은 절대복종하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철저한 숙청과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예고를 의미했다. 실제로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 제정, 공포됐다.
정부의 그런 강력한 숙청 의지 속에서 육군본부 정보국과 헌병사령부는 전군(全軍)을 대상으로 좌익분자 색출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군 수뇌부는 “반란은 남로당의 사주로 발생했다. 군부 내 잠복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실증해 주었다.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서 숙군이 필요하다. 군부의 순혈(純血)을 위해서 숙군이 절실하다. 북괴의 간접침략을 막기 위해서, 남로당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서 대대적 숙군을 단행해야 된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2. 김태선 리스트와 이승만 대통령의 숙군지시 및 조치
여순사건 이후 경찰은 그동안 수집해 두었던 군내 좌익 상황자료를 경무대에 제출했다. 당시 김태선(金泰善) 서울시경찰국장은 여순사건 직후인 11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경찰의 극비 문서를 전달했다. 이른바 ‘김태선 리스트’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자료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곧장 로버츠(William Roberts) 미 군사고문단장을 경무대로 불러 “당신네가 국방경비대를 만들면서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아무나 받아들이는 바람에 군 내부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소!”라며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로버츠 장군에게 “당신네들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해결하라!”며 닦달했다고 한다.
로버츠 준장은 이 문서를 이응준(李應俊) 육군총참모장에게 넘겨줬다. 로버츠 장군은 자신들은 조사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한국군 정보기관에서 이를 처리하도록 이응준 육군총장에게 문서를 건넸다. 로버츠 장군은 이응준 총장에게 문서를 넘겨주면서 “대통령의 지시사항이라고 하면서, 이것에 대한 조치결과는 다른 사람을 경유하지 말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응준 육군총장은 백선엽 정보국장과 신상철(申尙澈) 헌병사령관(소장 예편, 주월대사·체신장관 역임)을 자신의 안암동 자택으로 불렀다.
이응준 육군총장은 백선엽 정보국장과 신상철 헌병사령관에게 문서의 출처와 개략적인 경위를 설명한 후, “극비리에 숙군작업을 진행시키라”고 지시했다. 백선엽 정보국장과 신상철 헌병사령관이 총장으로부터 건네받은 문서는 이불보따리 만큼의 방대한 분량이었다고 한다.
이 문서는 그대로 육군본부의 정보국으로 넘겨졌다. 숙군에는 육군본부 정보국과 헌병사령부가 동원됐다. 좌익 혐의자 체포는 헌병사령부가 맡고, 조사는 정보국이 맡았다. 영등포 창고를 개조한 구치소에는 곧 수 백 여명의 좌익혐의 장병들로 가득 채워졌다.
조사 결과 경찰 자료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이듬해인 1949년 봄, 1차로 조사가 일단락됐다. 결과를 보고 난 백선엽 정보국장은 고민에 빠졌다. 확실한 좌익 활동 사실이 드러난 장병들만 수 백 여명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모두 처벌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백선엽 정보국장은 직접 상관인 이응준 육군총장을 찾아가 상의했다.
백선엽 정보국장은 이응준 총장에게, “그동안 숙군 관련 조사 활동을 벌이는 동안 여러 낭설과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만 조사는 일단락됐습니다. 그 결과 상당수 장병들의 좌익 활동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총장께서 직접 구치소에 수감된 장병들을 면담해 보시고 실정을 파악한 후 단안을 내려주십시오”라고 진언했다.
이응준 총장은 백선엽 국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로부터 사흘간 이응준 총장과 백선엽 국장은 구치소로 출퇴근하며 수감 장병 대다수를 면담했다. 좌익 혐의로 수감되었다고는 하나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동지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응준 총장은 결국 반란 주모자와 적극적인 활동자 혹은 폭력 파괴에 가담한 장병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하도록 하고, 좌익 경력은 있으나 활동을 하지 않았거나 부화뇌동 또는 소극적인 가담자들은 정상 참작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주동자에 대해서는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에서 유기징역에 이르는 형이 선고됐으며 나머지 대다수는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었다.
3. 숙군의 주체와 대상
정부에서는 제주4·3사건, 여수 제14연대반란사건, 대구 제6연대반란사건 등을 고려하여 앞으로 이러한 사태를 제재함은 물론 근본적으로 이를 예방하고 방지할 수 있는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공포했다.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부로 제정되어 발효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1949년 10월 19일 남로당 등 좌익계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등록을 취소시키고 공산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숙군의 실무는 육군본부 정보국과 헌병사령부, 그리고 수도경찰청(서울시경찰국의 전신의 사찰과(査察課)가 담당했다. 그중 숙군의 주체는 육군본부 정보국이었다. 정보국은 3개 과로 나뉘어졌는데, 제1과는 행정과였고, 제2과는 대북첩보공작을, 제3과 특별수사과(일명 특별조사과)는 좌익세력을 검거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해군에서는 해군본부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이 주체가 되어 해군에 대한 숙군에 착수했다. 함명수는 훗날 손원일 제독에게 “해군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좌익인사에 대한 숙군작업과 함정 납북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숙군이 본격화되자 육군정보국은 특별수사과를 특무대(대장 김안일 대위)로 개칭하고, 1949년 10월 10일에는 특무대에 군경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다. 10월 20일에는 특무대를 방첩대로 개칭함과 동시에 10월 21일에는 국본일반명령 제91호에 의거하여 방첩대를 정보국에서 완전 독립시켜 육군특무부대(부대장 대령 김안일)로 개편하여 숙군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한편 특무대는 수사경력이 있는 43명의 육군과 7명의 해군을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1월 15일까지 약 2개월간 육사에서 교육한 후 배치했다. 그리고 1949년 1월 2일에는 특무대 예하에 15개 파견대를 두고, 1949년 1월 20일부터 본격적인 숙군작업에 들어갔다.
숙군은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수사과(나중에 특무대)와 제1사단 정보주임 김창룡이 조사를 지휘했다. 혐의자 체포는 헌병사령부가 담당했고, 김완룡 중령은 법무감실에서 군사재판을 관장했다. 숙군의 핵심 업무는 지하조직망을 색출하고 혐의사실을 규명하는 조사업무였다.
그런 후 1950년 10월에 정보국 제2과(방첨과, CIC)를 정보국에서 분리하여 특무부대를 설치했다. 10월 21일에는 국방부일반명령 제91호에 의해 특무부대(Special Operation Unit)를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독립시켰다. 특무부대는 일면 ‘1348부대’로 불렀고 김형일 대령이 초대 부대장을 맡았다. 김창룡이 특무부대장을 맡은 시기는 1951년 5월이었다. 이때부터 특무대장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특무대 활동상황을 군부 내 상관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보(直報)하게 됐다.
육군특무부대는 숙군작업에 한층 박차를 가하면서 육군내외 모든 부대를 대상으로 5개월여에 걸쳐 수사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제4연대, 제14연대, 제6연대, 제15연대를 주 대상으로 실시했고, 이후 전 부대로 범위를 넓혔다. 숙군은 여순사건이후부터 시작하여 1954년 10월까지, 모두 7차례 실시됐다.
4. 숙군과정에서 김창룡의 활약
여순10·19사건은 숙군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군은 군에 침투해 암약하고 있는 공산세력을 뿌리 뽑기 위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숙군의 범위는 여순10·19사건 가담자은 물론이고 뒤이어 일어난 대구제6연대 반란사건 그리고 군내에 광범위하게 퍼진 공산세력의 척결을 단행했다.
숙군은 대한민국을 반공국가 및 반공군대로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건국선포식에 참석했던 맥아더 장군에 대한 답방형식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하고 있었다. 도쿄에서 여수 주둔 제14연대 반란사건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0일 급거 귀국했고, 국군은 반군들에 대한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동시에 군대에 침투한 공산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했다.
이때 정부에서는 국가보안을 제정(법(1948년 12월 1일)하여 반공국가로서의 국기(國基)를 다졌다. 숙군을 위해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특별수사과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숙군에 들어갔다. 육군총사령부 정보국장 백선엽(白善燁) 중령 지휘 아래 조사반을 구성하고 군내의 좌익 조직 근절에 착수했다.
먼저 여순(麗順) 지구를 맡은 조사반은 정보국 제3과의 빈철현(賓哲顯) 대위가 반장이고 반원으로는 이세호(李世鎬, 육사2기, 육군참모총장 역임), 김창룡(육사3기, 육군특무부대장, 육군중장 추서), 양인석(梁麟錫, 육사5기), 그리고 박평래(朴平來), 이희영(李熙永) 등이 선발됐다. 이들은 전남 광주로 내려가 포로가 된 반란군은 물론 생존한 토발군들을 포함해 3천명에 대한 엄중 조사를 실시하여 그 중 150여명을 남로당계(南勞黨系)로 가려내어 처벌했다.
조사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김창룡(金昌龍, 1916∼1956) 대위는 남로당 군사책인 이재복(李在福, 1949년 5월 26일 사형집행)의 비서 겸 연락책 김영식(金永植)을 서울 삼청동에서 체포했다. 김창룡은 그로부터 많은 비밀서류를 압수했는데, 그 중에는 군에 침투한 좌익계 500여명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명단에는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오일균(吳一均) 소령,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 조병건(趙炳乾) 소령, 증대장 김학림(金鶴林) 중위, 제15연대장 최남근(崔楠根, 1949년 5월 26일 사형집행) 중령 등 100여명의 장교도 들어있었다.
김창룡 대위는 김영식을 체포하고 중요서류를 압수한 공로로 대위로 진급된 지 70일 만인 1948년 11월 15일 소령으로 특진했다. 그때까지 제1연대 숙군 책임자였던 김창룡이 그 후부터는 전군에 대한 숙군의 주역으로 자리를 굳히게 됐다.
이후 김창룡 소령은 김영식을 전향시키는데 성공하여 지하에 숨은 좌익 세포들까지 잡아내는데 착수했다. 압수된 남로당 계보(系譜)에 의하면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오일균 소령은 육군사관학교 담당 세포책임자였다. 오일균의 임무는 군내 사병이나 민간인 좌익들을 육사에 입교시키고 입교한 생도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오일균 소령은 자신이 훈육했던 육군사관학교(당시 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생을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김창룡은 이러한 오일균을 추적하여 서울 적선동의 세탁소에 숨어있는 그를 체포했다. 이어 김창룡은 서울 종로 3가의 절에 숨어 있던 김종석(金鍾碩, 제4여단 참모장)도 체포했다.
김창룡 소령은 평양 출신 이재복의 정체도 알아내 1948년 12월 28일 신당동 그의 자택에서 체포한데 이어 이재복의 부책의 김용수(金龍洙)도 검거했다.
김창룡은 숙군을 실시할 때, 공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김정렬(金貞烈)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김창룡은 웬만한 사람의 키를 넘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차트에 남로당 수뇌부를 정점으로 하여 밑으로 피라미드 모양으로 퍼져나간 남로당 군사조직표를 그려놓고 수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숙군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김창룡은 숙군을 통해 승승장구했다. 여순사건 당시 대위였던 김창룡은 1949년 1월 15일 소령으로 진급하고, 이로부터 6개월 뒤인 7월 15일 중령으로 특진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21일 대령으로 진급한데 이어 1951년 육군특무부대장에 취임한다. 숙군을 맨 처음 총지휘했던 백선엽 정보국장도 1949년 광주주둔 제5사단장으로 영전해 갔고, 육군총장이던 이응준 장군도 1949년 제8연대의 강·표 월북사건으로 사임했다. 그런 점에서 김창룡의 숙군에 대한 기여는, 숙군과정에서 다소 무리가 있었다고 해도 숙군에 대한 그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Ⅳ. 전쟁이전 숙군 경과와 결과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발생한 국군 제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에서는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숙군을 단행하게 됐다. 이에 따라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특별수사과를 설치하고 1949년 1월 2일 예하에 15개 파견대를 설치하여, 1949년 1월 20일부터 숙군에 착수했다.
제1차 숙군은 여순10·19사건 직후부터 1949년 3월까지이다. 제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육군 정보국은 군내 공산 불순분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정보국 김안일 대위와 김창룡 대위의 지휘아래 단행됐다. 이 시기는 여순10·19사건에 관계했던 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로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 세포들의 색출에 주력했다. 그 결과 현역장병 324명과 군 관계 민간인 40명 등 364명을 검거했다. 검거된 주요 인물로는 최남근 중령(제15연대장), 김종석 중령(여단장 대리), 오규범 중령(제1공병단장), 오일균 소령(대대장), 조병건 소령(육사교수부장), 박정희 소령 등이었다. 이때(1949년 3월 4일) 국방참모총장(현재 합참의장 해당) 채병덕 대령은 ‘숙군문제에 대한 담화’를 통해 “과거 3년간 지도 불충분과 악독한 공산분자의 공작에 의하여 국군내에 상당한 세포조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중략), 숙군은 남북통일로 일단락 짓돼, 세계적 배후가 박멸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제2차 숙군은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 간 실시됐다. 이 시기에는 1949년 2월 남로당 총책(이재복)의 비서였던 민간인 김영식을 체포했고, 3월에는 이재복의 뒤를 이어 남로당 특수부 총책이 된 이중업을 체포함으로써 수사에 활기를 띠게 됐다. 수사팀은 이들에게서 얻은 500명의 좌익세포조직 명단과 제1차 숙군시 얻은 정보를 근거로 현역 장병 215명, 군 관계 민간인 30명 등 245명을 검거하여 남로당 특수부를 근절시켰다.
제3차 숙군은 1949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이다. 제1·2차 숙군이 끝난 후인 1949년 10월 경 북한정치보위부의 최금경이 정보수집, 군내 반란야기, 폭동, 파괴, 요인 암살 등의 지령을 받고 잠입하여 남한 내 요인들을 포섭하는 등 정보망을 조직하며 일대 음모사건을 획책했다. 이에 군 당국은 사태의 중대성을 직감하고 17개 수사반을 조직하여 3개월간에 걸쳐 증거자료를 수집한 후 수사선상에 오른 군인 212명, 군 관계 민간인 320명 등 532명을 검거했다.
제4차 숙군은 1950년 3월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대남정치공작대) 총책 성시백이 군사정보 수집과 군 내부 반란 야기 및 요인 암살 등의 임무를 띠고 잠입했다. 이에 군 당국은 수사망을 펴고 여기에 관련된 군인 및 군속 50명, 군 관계 민간인 136명 등 186명을 검거했다. 또한 이 시기 수사당국은 남로당 정치고문 이주하와 남로당 당수격인 김삼룡을 3월에 체포하고, 북로당 간부 성시백을 5월에 체포함으로써 남한 내 공산당의 뿌리를 제거하게 됐다.
이처럼 4차례의 대대적인 숙군을 통해 군 정보당국은 군인 801명과 군 관계 민간인 526명 등 1,327명을 검거함으로써 군내 공산세력을 완전히 척결하게 됐다. 6·25전쟁 초기 전황이 매우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군대처럼 집단적인 투항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전쟁 이전 이승만 정부의 이와 같은 대대적인 숙군 조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숙군은 전쟁기를 거쳐 전쟁 이후에도 김창룡 특무부대장에 의해 3차례 계속됐다. 숙군은 6·25전쟁을 전후하여 모두 7차례에 걸쳐 1,677명의 좌익분자를 색출 처리했다. 숙군은 전쟁 이전에 4차례에 걸쳐 실시됐고, 전쟁기간을 거쳐 1954년까지 3차례 더 숙군을 단행했다.
Ⅴ. 맺음말 : 숙군이 대한민국과 군에 미친 영향
숙군을 통해 대한민국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공산세력을 척결할 수 있는 반공국가로서의 안보적 토대를 마련했고, 국군은 반공군대로 자리매김함으로써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의 남침공격계획을 초기에 좌절시켰고, 그들이 가장 우려했던 미군참전을 가능케 했다. 숙군은 대한민국과 국군을 아시아를 넘어 세계가 인정할 만큼의 대표적인 반공국가이자 반공군대로 탈바꿈시켰다.
만약 숙군이 없이 6·25전쟁을 맞이했다면, 전쟁 중 여수주둔 제14연대 반란사건과 같은 일이 국군 내에서 발생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숙군은 대한민국을 구하였고, 국군을 반석위에 놓게 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백선엽, 김창룡, 이응준, 김안일, 빈철현 등의 활약은 대한민국을 구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숙군의 가장 큰 공로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백선엽 정보국장 그리고 김창룡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숙군에 대해서는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숙군을 총지휘했던 백선엽 정보국장은 회고를 통해 “그로부터 1년 후 전쟁이 터졌을 때 비록 개별 병사가 적에게 투항한 사례가 있어도 집단 투항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만약 여순사건이 없었고 숙군이 없었더라면 이후 6·25전쟁 상황에서 국군이 자멸(自滅)의 길을 걷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숙군에 참여했고, 주월한국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이세호 장군은 “숙군이란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6·25와 같은 대참변이 발생했다고 상상한다면, 대한민국은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의 늪에 빠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세호는 계속해서 숙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박헌영은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40만 이상의 민중봉기와 군 내의 반란으로 남한은 하루아침에 공산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북한 남침 후 군에서는 단 한건의 반란사건이나 하극상 사건은 물론 민중봉기가 발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는 어렵고도 힘든 철수작전이란 후퇴에 후퇴가 거듭되는 악조건 속에서도 낙오되거나 부대를 무단이탈하는 일 없이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란 필승의 신념으로 낙동강 교두보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그 교두보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적과 싸워 지켜냈음은 우리 국군 전사에 길이 빛날 성공사례로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숙군에 대해서는 북한의 6·25전쟁을 다룬 ‘조국해방전사’에서도 다루고 있을 정도로 북한에게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북한군 자료에 의하면, “숙군의 목적은 진보적인 애국적 장병들을 제거함으로써 믿을 수 없는 ‘괴뢰군’을 믿을 수 있는 전쟁수단으로 조직하고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심문하고 고문했다”고 하면서, “숙청한 장병 수는 1949년 7월 말까지 1,749명에 달하고, 그 대부분은 사병들이지만 그 가운데는 려단 참모장, 련대장급의 고급장교와 대대장, 중대장급의 중하층장교도 수백 명이나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또한 북한군 자료에서는 “그 후에도 숙청은 계속되어 당시 괴뢰군 총수의 근 10%나 되는 8천여 명의 장병들을 ‘빨갱이 딱지’를 붙이며 숙청했다”고 비판했다.
숙군은 군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숙군 작업이 진행되자 설 곳을 잃은 좌익계 장병들은 일부 월북의 길을 택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제4여단(여단장 김백일 대령) 예하 춘천 주둔 제8연대(연대장 김형일 중령·중장 예편) 2개 대대 월북사건이었다. 대대장인 표무원(表武源) 소령과 강태무(姜太武) 소령은 1949년 5월 초 부하 360명을 데리고 춘천 및 인제방면으로 38도선을 넘어갔다. 이밖에도 해군에서는 군내에 침투한 좌익세력들이 함정을 탈취하여 해상으로 월북하는 사례도 있었다.
군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서 유독 ‘4’자가 들어간 부대들에 문제가 많았다. 제4연대에 좌익이 많았고, 제4연대의 1개 대대를 모체로 창설된 제14연대는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제4여단의 예하부대에서는 대대장들이 월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국군부대 명칭에는 ‘4’자를 넣지 않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여순사건을 사건을 야기한 제14연대는 완전히 해체됐고, 제4여단은 제6여단으로, 제4연대는 제20연대로, 제6연대는 제22연대로 부대명칭을 바꿨다.
숙군작업 과정에서 옥석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업은 사상적으로 혼미에 빠진 국군을 ‘자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거쳐 소생시켰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숙군은 6·25전란 속에서 대한민국을 구했고, 대한민국을 반공국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을 반공군대로 육성,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게 하고 있다. 이러한 숙군은 결국 전후 한미동맹과 함께 대북억지력을 발휘하면서 대한민국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